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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(군산사람 인터뷰)-㈜조이엠 문조영 대표

    채명룡

    • 2019.01.22 19:11:57

    (군산사람 인터뷰)-㈜조이엠 문조영 대표

    인생 3,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.

    - 조이엠 문조영 대표

       
     인생은 순간이며, 흥하고 망하고는 칩 하나에 달려 있다.”

   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. 한 때 미국 카오디오 시장을 주름잡았던 문조영 대표의 가슴 아린 말이다. 실패는 큰 구멍이 아니라 깨알처럼 작은 게 발단이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. 쓰디쓴 경험은 괴로웠지만 그를 단련시켰고, 스스로 내면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.

    군산시 옥산면이 고향인 그는 성장기 고향을 떠나 KIST에서 잘 나가는 연구자였다. 그리고 고성능 카오디오를 만들어 100% 수출하면서 미국 시장의 70% 정도를 석권했던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성공한 기업가였다. 그러나 호사다마(好事多魔)라고 잘나가던 수출 제품들이 고장·반품되기 시작했고, AS로 대응할 길이 없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. 그로부터 15년 이상 긴 시간이 지났다.

    마음이 자유로워지자 일이 손에 잡혔다. 틈새시장은 그래도 중소기업의 몫이다. 그는 내가 만든 제품이 오래도록 시장에서 팔리는 일을 해보고자 했다. 그래서 신발 끈을 묶고 회사를 다시 시작했다.

     

    내 정년은 내가 정한다

     

    모든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선택해서 걸어 온 것이다. 지금에 와서 보니까 당시에는 내가 선택한 건데 내가 선택한 것 같지 않았다. 정년을 하고 나면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, 나는 내 분야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.

    저는 지금도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’, ‘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일기처럼 쓰고 있습니다. 이제는 정보가 널려 있으며 못하는 거, 싫은 거는 안 해도 되는 시대입니다. 선택과 집중을 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하는 것, 그게 인생으로 바뀐 거죠.”

    휴대폰도 5년 정도면 없어질 거라고 본다. 가상의 세계에서 스마트 워치가 손바닥에서 구현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. 디지털은 발전하겠지만 하드웨어 쪽은 아직 수요가 있다.

    그의 소박한 꿈은 군산에서 내가 설계한 제품이 완제품으로 만들어져서 시장에서 꾸준히 나가는 회사를 만드는 일이다. 그가 개발하려는 건 틈새시장이다. 예를 들면 라디오가 시장에서 지금도 개발되고 생산되고 만들어 진다는 점이다. 핫한 상품은 조직과 돈이 없으면 안된다. 그러나 계륵과 같지만 꼭 필요한 제품은 중소기업의 영역이다.

     

    IC칩 한 개의 시련

     

    한국과학기술원 KIST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다가 서울에서 대덕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자리를 대우전자 중앙 연구소로 옮겼어요. 직장 생활을 접고 1992년도에 카오디오 관련 사업을 시작해서 100%수출을 했는데, 10년 정도 사업이 잘됐거든요.”

    DC 12볼트로 구동되는 엠프 성능이 1200와트를 냈다. 디지털 엠프 초기 때였지만 출력이 상당히 좋았다. 미국에서는 자동차 오디오를 고출력 엠프로 튜닝하는 게 한 때 유행했다. 바람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. 메이저급 회사들이 다른 제품을 선택할 게 없으니까 줄서서 사갔다.

    반도체 IC 하나가 싱가폴 공장에서 회사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 공장으로 옮겨 생산되었다. 그 부품이 사용된 롯트가 문제였다는 걸 알았을 때는 사업이 이미 기운 뒤였다.

    콩알만 한 IC칩 하나가 세계를 석권했던 사업을 망하게 만들다니, 분하고 억울했지요. 울분을 토해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발광했지요.”

    세계를 주름 잡았던 카오디오가 칩 한 개 때문에 폐품이 된 것이다. 40피트 컨테이너로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갔던 물량이 쌓여서 돌아왔다. 그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. 정말 힘들었다.

     

    다시 시작한 창업의 꿈

     

    꿈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좌절되니깐 허탈했지요. 부도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었고, ‘내 탓이오하는 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.”

    갈 곳이 없을 때 12천을 줘야하는 거래처 사장이 나중에 갚으라고 3천만원을 줬다. 다세대 반 지하에 전세 들어가 살았다. 형편이 안돼 공부 밖에 할 게 없었다고 했던 아들이 카이스트에 있다가 지금은 독일로 갔는데, 28세 때 우리나라 최연소 우주과학 분야 박사가 되었다. 미안하면서도 자랑스럽다.

    중국에 있을 때 어느 날, 어머니가 전화로 수술하려는 데 특별한 게 없으면 한번 오라는 거였어요. 그 시기에 광주의 지인이 중국에 와서 연구소장 해줄 수 없느냐, 회사 틀을 잡아달라고 제의를 했지요. 그 분도 아픔을 겪었는데, 내가 설계해 준 제품이 히트를 쳐서 재기했거든요. 중국에서 잠시 돌아와 광주에 인사차 들렀다가 거기에서 주저앉았어요. 거기에서는 책임질 게 없으니 영혼이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.”

    광주 생활을 정리하고 더 늦기 전에 고향에 가서 사업을 한번 해보자라고 결심했다. 고향에 내려와서 작지만 내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다시 시작했다.

    스스로 채찍질을 강하게 했다.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. 특허 7건을 등록했고 출원하여 놓은 게 3건이다. 독학으로 터득했던 3D 설계를 하면서 군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. 연구를 하면서 제품을 만들려고 한다.

     

    영혼이 자유로워야 생각이 머물지 않는다.

     

    영혼이 자유로워야 생각이 머물지 않지요. 한 가지에 집착하다보면 고정 관념이 생기고, 자리에 연연하다보면 ‘ooo다워야 한다는 형식에 얽메이게 되더라고요. 내 생각대로 하는 게 필요한데, 요즘엔 멍 때리기 대회도 있잖아요. 모두 비워냈을 때 새로운 생각이 들어옵니다.”

    잘 커준 딸은 출가했고 공부만 했던 아들은 해외로 나갔다. 돌고 돌아 홀로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살고 싶다고 아내에게 상의했을 때 뜻을 같이해줘 옥산면 쌍봉리 접산마을에 조그만 전원주택을 지어서 내려왔다.

   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군산대와 상의했더니 방향을 잡아줬다. 하나씩 풀어 나갔다. 정부

    채명룡 / 2019.01.22 19:11:57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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